닭강정과 나 불라불라 떠들기



아파트 단지에 또 와 있다. 닭강정을 파는 천막이.

아침은 다시마에 초장 찍어 먹고, 점심은 짜렝게티를 끓여 먹은 내가 저녁을 거하게 먹을 리가 없잖은가.
만약 저녁에 오곡밥과 초록색 나물, 쇠불고기나 고등어 구이, 심지어 달걀 후라이 같은 걸 해 먹는다면
그것은 희생된 아침밥과 점심밥에 대한 모욕이다. 형평성에 위배된다. 위화감을 조성한다.
아니 그보다도 그냥 닭의 시체가 먹고 싶어요. 아저씨.

어쨌든 지갑을 연다.
천원짜리 네개가 보인다. 닭강정은 만원이다.
오. 책상 위에 천원이 있다. 시작부터 럭키다.

옷장과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공격한다. 주머니는 모두 쓸쓸하다.
간혹 바스락거려서 희망을 품어 보면 신용카드 영수증이다.
왜 제때 소각하지 않고 냅둬서 나를 여러번 실망시키는가 가족들이여.

옷은 포기하고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다.
서랍엔 왼갖 잡동사니가 수북하지만 돈은 없다.
백원 짜리가 몇개 보이지만 백원 짜리를 오십개 가져다 줬다간 내가 십자 들어간 욕을 오십번 얻어 먹을 거다.

가방들을 만져 본다.
난 가끔 뭘 사고 남은 돈을 지갑에 넣기 귀찮아 가방 앞 주머니에 찔러두곤 하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걸로 봐서는, 최근의 난 부지런했나? 그럴 리가..
그러나 엄마의 가방에서 천원을 득했다.
천원 짜리에 절하고 뽀뽀라도 하고 싶어진다.

책장의 책들 사이를 뒤진다.
가끔 비상용으로 거기 만원 짜리를 꽂아두곤 했던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아무리 책들을 꺼내 봐도 그 사이엔 아무 것도 없다.
다들 나 없는 새 급전 쓸 일이 많았나 보다.

아, 돈을 찾았다.
거금 30유로와 52달러가 있다.
젠장.
시중보다 싼값에 닭강정을 받고 외화를 매각하겠다고 말해 볼까.
환율을 고려해 보면 오히려 이익일텐데요, 아저씨.

저금통을 열었다.
누군가 그동안 많이 급했었나 보다.
심지어 500원짜리도 몇 개 안 보인다.

30여분을 온 집안을 뒤져서 모은 돈이 500원짜리 4개를 포함해 8천원.
2천원이 모자라서 닭강정을 못 먹니.
그렇다고 100원짜리를 또 쨍그랑거리며 20개 가져가자니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그러나 걸어서 왕복 10분 거리의 은행엘 가느니 차라리 굶어죽고 말리라.

닭강정은 맛이 없을 거다.
기름도 안 좋은 걸 쓸 거야, 아마.

밥이나 해서 다시마에 초장이나 찍어 먹어야겠다.
건강에 좋을 것 같다.


P.S. 한밤중에 들어온 가족더러 꼭 꼭 사오라고 시켜서 드디어 먹었다.
이미 다시마가 배 속에서 불고 있어서 심히 배가 부른 나머지 많이 못 먹어 서러웠다.
그런데 가족 왈, "5,000원짜리 小자도 있던데."
정말 정말 저어어엉말 서러웠다..


덧글

  • 완소콩씨 2010/10/27 19:43 # 삭제 답글

    으아아아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제가 피자를 시켜먹고 싶어서 ㅠㅠㅠ 온 집안을 뒤지던 ㅠㅠㅠ 그 상황이 ㅠㅠㅠㅠ 그대로 떠오르네요 ㅠㅠㅠㅠㅠ
    저는.. .아버지 양복바지와 어머니의 점퍼도 슬쩍 찔러 본답니다..
    가끔 거스름돈을 거기에 그냥 넣어두실 때도 있거든요....

    ..하지만 꼭 배는 미친듯이 고프고 밥은 없고.. 반찬도 변변찮고.. 갑자기 피자(혹은 치킨)이 땡기는데..
    돈이 없을때..
    ...어머니의 점퍼도.. 아버지의 양복바지도 깨끗하더라구요..


    평소에 세탁할때는 그렇게 짤짤짤 흐르더니만............................................ ㅠ
  • 피피앙 2010/10/27 21:25 #

    쇤네는 그래서 피자는 인터넷 결제가 가능한 온라인 주문을 늘 애용합니다......쇤네 지갑엔 늘 현금이 없습니다 흑.
    온 식구들의 옷을 뒤졌건만, 나오는 돈은 없고. 언제부터 우리 식구들이 이렇게 알뜰 살뜰했는지 말입니다?
  • 은소 2010/10/27 19:54 # 답글

    닭강정 오는 날 알려주시면 피피앙님 댁 앞에 가서 사다가 갖다 드리지요...
    ATM기는 너무 멀고, 심지어 시간이 늦으면 수수료도 물어야 하니까요(먼산).
    아무튼 잠시의 노동으로 4000원을 버셨으니 이득이고(과연?) 가족들에게 돈을 그동안 어디서 썼는가 추궁할 수 있으니 다행(과연?).
    이제 누군가가 도토리 잊어버린 다람쥐마냥 채워 놓기만을 바라겠사와.

    쇤네는 바깥에 있는 가족에게 사오라고 시키는데 캬캬캬.
  • 피피앙 2010/10/27 21:26 #

    지난 번엔 금요일이었는데 어쩌자고 오늘 오셨는가 모르겠음. 뜻밖의 사태에 몹시 당황했음. 후.
    바깥에 있는 가족들은 늦으니 저녁 시간을 기대할 수가 없어........으헝
  • zeitgeist 2010/10/27 20:13 # 답글

    이런 현실적인 랩소디는 제가 그리는 고액연봉 빵님의 이미지랑 거리가 멀어요. 가난한 제가 더 잘 맞아요!!
  • 피피앙 2010/10/27 21:27 #

    쇤네는 한번도 고액연봉이었던 적이 없지 말입니다...... 뭐 쇤네 카드는 있사오나 아저씨가 카드를 안 받기 때문에. 사실 카드에도 돈은 별로 없고ㅠㅠ 쇤네도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 뇨자..
  • lukesky 2010/10/27 20:13 # 답글

    제게는 만원짜리가 있는데, 천원짜리 열장도 있고, 저금통 속에 500원짜리 스무개도 있는데
    어이하여 닭강정 파는 천막이 찾아오지 않는단 말입니까. ㅠ.ㅠ
  • 피피앙 2010/10/27 21:27 #

    후후후후후후
    후후후후후
    이래서 세상은 공평한가 보아요! 야호!
  • 아바 2010/10/27 20:42 # 답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닭의 시체를 먹고 싶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라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백원짜리 한개가 모질라서 뭔갈 못 사먹었던 추억이 ㅋㅋ 생각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덜덜 뒤져서 서랍안까지 다 뒤졌건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닭강정..사실 저는 그거 못 먹어봤는데..뭔가 양념통닭같은 느낌인가요??오늘 저녁은 건강해지실 거에요.ㅋㅋㅋㅋ
  • 피피앙 2010/10/27 21:29 #

    쇤네는 죽은 닭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지 말입니다. 닭강정=거의 양념통닭 맞사와. 겉에 땅콩 뿌려서 강정 맛이 나긴 하지만요. 뼈가 없어서 좋아요. 악 설명하다 보니 또 먹고 싶어졌
    진짜 평소엔 막 시굴시굴 굴러다니던 천원 짜리가 하나도 안 보이고 막 ㅠㅠ 완전 슬펐사와. 쇤네 저녁엔 건강하게 다시마에 초고추장 찍어 먹고 김치 먹었사와요. 밥도 걍 잡곡 엄청 넣어서 잡곡밥으로다가.
  • 我的雲 2010/10/27 23:40 # 답글

    댓글을 달아서 댓글창의 베네딕트 님을 유린해보지 말입니다.

    가끔 땡기는 날 소녀는 쿠폰 서랍을 엽니다. 후후후후후후후 아홉장 있는 날에는 웁니다만 ;ㅁ;
    닭강정 트럭이라니 그런 득템스러운 천막님도 세상에는 계시는 군요-0-
  • 2010/10/27 23:46 #


    쇤네도 그러고 싶었지 말입니다. 후후후후후후. 아적운님이 첫번째시라능.
    쇤네는 쿠폰을 열심히 모으는데... 모아 놓고 보면 유효기간이 지난 게 꼭 하나씩 발견되더란 말입니다. 이것도 받아 줄까요? ;ㅅ;
  • 2010/10/28 09: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피피앙 2010/10/28 09:49 #

    그랴? 여기는 괜찮여. 쫄깃쫄깃하고 달착하면서 바삭바삭. 습. 난 귀찮아서 멀리는 나가기 싫고, 걍 아파트 바로 밑에 천막을 쳐 놨길래ㅠㅠ 으헝헝
  • 2010/10/28 12:0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피피앙 2010/10/28 12:38 #

    으으음 역시 그런 거군. 아줌마 천잰데?
  • OTL 2010/10/28 13:52 # 삭제 답글

    ㅋㅋㅋㅋㅋㅋㅋ 신나게 웃었습니다 삶의 앵스트가 느껴지는 ㅋㅋㅋ 그래도 엔딩은 해피하니깐요
    닭강정 먹어본지 엄청 오래됐는데...제가 가장 최근 겟한 남의 살은 베트남국수에 든 쇠고깃점...닭은 지난주였든가요
    "시중보다 싼값에 닭강정을 받고 외화를 매각하겠다고 말해 볼까" 에서 완전 쓰러졌어요 으하하하하하
    맛있게 드셨기를 ^^
  • 피피앙 2010/10/28 14:35 #

    웃어 주셔서 다행입니다. 쇤네는 어제 쫌 내가 왜 사나 지갑에 만원도 없고, 이런 심정이었지 말입니다.
    돈을 손에 들고도 왜 닭을 사먹질 못하니... 유로랑 달러가 있는데. 은행 가면 바꿔주는데 ㅠㅠ
  • 2010/10/28 17:0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피피앙 2010/10/28 20:08 #

    내 손으로 산 적이 없으니 몰랐어;ㅅ; 훌쩍
  • 2010/11/02 18:4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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